사진=인터넷 캡처
‘코기토 에르고 숨’ 즉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가, 사회가, 세상이 존재할 수 없다. 내 몸에서 각 부분을 하나씩 한번 떼어내 보자. 다리도, 팔도, 가슴도 떼어내 보자. 아니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내 신체의 여러 부분을 수술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남아 있다. 나는 육체의 일부가 없어져도 여전히 나다. 한쪽 눈이 없어지고 귀가 일그러지고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도 나는 그대로 나로 남아 있다.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을 때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
어느 날 오래된 모임에 나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한 나이 지긋한 회원이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는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4차든 8차든 백신을 맞을 테고 죽을 때까지 마스크 쓰라면 쓸 거야, 나는 내가 죽든 말든 그렇게 할 테니까 나에게 마스크 쓰라 벗으라, 백신 맞으라 말라 더 이상 말하지 마. 나는 국가를 믿어.”
그의 말은 아마도 진심은 아닐 것이다. 왜냐면 미성숙한 사람도 아니고 이제 노년이 다 된 사람이면 누구도 국가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며, 더구나 미래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어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은 약간의 취기와 백신 마스크에 대한 불신의 말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백신을 4차까지 맞고 철저히 마스크를 쓰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불쾌감, 자기와 다른 사고가 논해지는 것에 대한 자신 사고가 일으키는 과민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는 전문직 종사자로 내가 선배로 부르는 사람이다. 그는 살 만큼 살았고 배울 만큼 배우고 교회도 나가 신앙까지 있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춘 사람이다. 평소에 정치적인 말을 모임에서 하지 않아서 회원들은 그를 가장 비정치적인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면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국가 명령에 따라 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쓰는 가장 비지성적이며,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전체주의적인 사람이었음을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것이 된다.
우리는 많은 행동을 명령에 따라 혹은 관습에 따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고, 옷을 입고, 차를 몰아 출근을 한다. 이빨을 정성스레 닦고 비교적 깔끔하게 옷을 입고, 팬티 위에 바지를 입는다. 아침에는 너무 배부르지 않게 간소하게 먹는다. 이러한 행동들은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행동들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그렇게 하도록 수없이 명령을 받았고, 마치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배우듯이 따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상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매번 생각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관습, 명령에 따른 자동 기계 같은 행동은 시간을 절약해 주고, 에너지의 낭비를 막아주며, 더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교육된 행동, 사회적 관습에 따라 하는 행동,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하는 행동들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첫째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둘째는 나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셋째는 나의 건강, 안전, 삶에 도움이 되고, 넷째는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고, 다섯째는 기분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하지 않을 수 있고, 여섯째는 국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동 기계처럼 하는 행동에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안에 이러한 요소들이 거의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요소들을 하나로 합치면 실용적 행동, 보편적으로 올바른 행동이 된다. 그렇다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틀린 행동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매일 흔하게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동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팬티 위에 바지를 입는 것처럼 마스크를 매일 착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마스크 착용이 팬티 위에 바지를 입는 것과 같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일상적 행동 속에 포함 시킬 수 있을까? 만약에 마스크 착용이 우리가 하는 일상적 행동들이 갖고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마스크가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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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는 남에게 해가 된다. 환경 공해도 일으키며,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이 묻어있어 질병을 옮길 수 있다.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바이러스를 막지 못할 뿐 아니라, 호흡곤란, 피부염, 두통, 집중력 부족, 위급상황에서의 대처 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최근에 필자의 의원에 내원하시는 노인들 중에는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넘어지고, 휘청거리는 분들이 부쩍 늘어났다. 한결같이 마스크를 쓰던 사람들이다. 넘어져 크게 다치는데 그러면서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있다.
마스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갖고 있는 요소들을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마스크 착용은 일상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일상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거꾸로 일상적으로 해야 되는 일로 믿고 행하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유독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한국은 선택할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처럼 복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부당하게 큰돈을 버는 자와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에게 축복인 나라가 됐을까?
내가 마스크를 쓰는 사람에게 왜 쓰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나라에서 쓰라고 하니까, 남들이 다 쓰니까 쓴다고 대답한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데 그래서 복종한다면 자신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나라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닐까? 자신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남이 자신 삶의 주인이 아닐까?
나라가 개인보다 더 정보력이 크고 코로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면 나라가 국민에게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보다 국민에게 알고 있는 정보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올바르게 전달하여 국민이 신중히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윤리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성적 시도라면 ‘자유’는 그것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자유는 ‘하겠다. 하지 않겠다.’, ‘예 아니요.’, ‘원한다.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의 동기가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라면, 그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적어도 두 번 이상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나라의 명령을 복종하기만 한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하면서도 국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며 자기 정당화를 하는 사람이 될 위험성이 있다.
내가 오래된 모임에서 “국가를 믿기 때문에 명령에 따라 마스크를 쓰고 몇 차까지라도 백신을 맞겠다.”는 선배를 보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가득 찼음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다.
사진=SBS뉴스 캡처
우리는 국가의 명령, 관습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것에 반항하여 무조건 반대로 행동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때로는 그에 따르는 것이 편하고 유익한 할 뿐 아니라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애국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명령, 관습에 따라 하는 행동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건강한 삶과, 행복을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무엇이 진정으로 올바른 행동인지는 세심하고 다각도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수의 말도 들어야 하지만, 소수의 말도 무시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으므로 사회와 국가에 속해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에게 많은 것이 강요되고, 명령되고 교육으로 습득되므로 모든 것을 스스로의 생각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명령,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속박하게 만드는 관습, 그리고 코로나 사태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조장되는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축이 아니라 인간이기를 원한다면,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내 존재의 존엄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오순영 칼럼리스트 / 가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