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국 귀환이 좌절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지난 1962년 3월부터 1965년 7월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보냈다.사진=파이낸셜 뉴스 캡처
JP는 1962년 11월 미국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내려 태평양 사령관의 안내로 일본으로부터 기습(1941년 12월 7일)을 받았던 현장을 둘러보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병 문안을 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호놀룰루 동쪽 산기슭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와이키키 해변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핑크빛 3층 건물의 202호였다.
병원장의 안내로 병실에 들어가니 프란체스카 여사가 맞이해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두 팔을 기부스한 채로 천정에 묶여 있었다.
왜 이렇게 되셨느냐고 물으니 어제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느냐, 나는 서울로 갈 거야!”라며 소리치다 침대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JP는 노(老) 대통령을 한참 지켜보다가 너무 안타까워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67년7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고(故) 이승만 대통령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 접견.사진=e영상역사관 캡처
◆ 박정희 의장의 배려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물
JP는 호주머니에서 2만 달러가 든 봉투를 꺼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드리면서 “이 돈은 서울을 떠나올 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께서 이보다 열 배를 드려도 모자랄 텐데 부족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님께 전해 드리라며 챙겨주신 것입니다”라고 박정희 대통령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봉투를 받아든 프란체스카 여사는 목이 메인 듯 말을 못하고 눈물만 주르르 흘리더니 잠시 후 눈물을 닦고 나서 박정희 의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 달라고 하더랬다.
그 당시 2만 달러는 한국의 지도자가 만질 수 있는 최고 액수였다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JP는 너무 가슴이 아파 외면하였다고 한다.
일국의 영부인이셨던 할머니가 허름한 옷을 입고 부군의 간병을 하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던 것이다.
연금도 없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지며 살아가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분명히 조국이 있고 그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건국을 하였으며 6·25 전쟁에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지켜낸 영웅을 간병하며 조국이 아닌 남의 나라의 병실에서 눈치를 받아가며 사는 푸른 눈의 프란체스카 여사를 두고 떠나려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왼쪽앞)이 검은 정장에 두손을 잡고 이승만의 유해를 영접하기 위해 1965년 7월23일 김포공항에서 3부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글.사진=뉴데일리 캡처)
◆ 유해 귀환과 밴플리트 장군의 미담
그래서 옆방에 나와서 박정희 의장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모셔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병원장은 “지금 상태로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고 가다가 운명하실 수 있다”며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 모셔가라고 만류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는데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7월 23일 차가운 시신으로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과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를 영접하였다.
그 당시 세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을 못 들어오게 막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좌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음해하기 위해 퍼뜨린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김포공항에서 거행된 이승만 유해 봉영식. 오른쪽 사진은 양자 이인수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희망한다는 기사.사진=동아DB-조선DB/뉴데일리 캡처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는 1965년 7월 21일 밤 11시에 미군 수송기에 실려 호놀룰루 공항을 출발하여 23일 오후 3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송기 안에는 6·25 전쟁 때 가장 친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왔던 밴플리트 장군이 함께 타고 왔다.
밴플리트 장군은 플로리다 고향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바로 하와이로 달려왔으며 유해 운구를 위해 미군 수송기를 협조해주는 등 여러 가지를 도와준 은인이다.
그리고 미공군 장병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운구를 맡아 수송기에 정중하게 모시고 영결식 까지 해주었다.
그들은 외국 원수의 유해에 대한 예의도 깎듯하게 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모습에서 선진국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인산인해를 이룬 이승만 전대통령의 장례식 영구행열과 추모 시민들.사진=뉴데일리 캡처
다음은 박정희 대통령 조사 전문이다.(참고로, 조사 전문은 뉴데일리 기사에서 발췌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전문◀
조국독립운동의 원훈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고(故) 우남 이승만 박사 영전에
정성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사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몸소 역사를 짓고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 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榮辱)의 진세인연(塵世因緣)을 끓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범인용부(凡人庸夫)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世紀的)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 나서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이고 발길을 형극(荊棘)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했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 속에서도
만난(萬難)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建國人)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金文字)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노역(勞役)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항일반공(抗日反共)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었고 또 그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 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果斷力)의 역사적 발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었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究竟)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의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失政) 책임으로써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귀국 제일성은
오늘도 오히려 이 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遺言)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 사활(死活)의 잠언(箴言)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羊)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 여러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만리의 쓸쓸한 해빈(海濱)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 유택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길지(吉地)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창군(創軍)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護國神)이 되셔서
민족의 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65년 7월27일 대통령 박정희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가 묻힌 60년전의 동작동 국군묘지 일대. 사진은 장례직후 1965년 7월29일 찍은 묘지봉분과 참배하는 사람들. 묘소에서 국군들의 묘역들이 한눈에 바라보인다.사진=서울기록원/뉴데일리 캡처
※ 조일희(공군 대령 예편. 헌병감 역임)님이 받은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