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터넷 캡처.


이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得時無怠(득시무태)라는 말처럼, 관료주의가 ‘코로나 사태’라는 때를 만나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료주의는 문서화된 규칙을 기초로 확립된 분업화와 계층화된 조직구조로 구성원의 자발성과 비예측성을 제거하여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가 아닌 일정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관료집단은 실무를 담당하는 능력 있는 사람은 맨 밑에, 직급에 벗어날 만한 능력이 없어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단에 위치하는 피라미드식 구조의 위계질서를 가진 집단이며 구성원은 저마다 주특기에 맞는 부서에 배속되어 있지만, 자신의 특기 외에는 무지하고 모두 복종 전문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난 2020년 4월20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간 회의를 하고 있다.
소득 하위 70% 가구만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정부안은 보편적 보상에서 볼 때 모순이라며 다음날인 4월21일 오마이뉴스는 '코로나 해결사' 칭찬 받던 한국, 관료주의에 발목 잡히나'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에 따라 한국의 관료주의는 코로나 발발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국민으로 하여금 의욕과 희망을 잃게 만들고, 국민의 생각을 조종하고, 개인을 부품화하고, 공포에 떨게 만드는 수많은 문서와 영상 제작하고, 팸플릿, 포고문, 현수막을 시선이 가는 곳마다 붙이고, 국민을 감시·검열하여 국민이 다양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업무를 규칙과 절차에 따라 효율적으로 하도록 만들었다.

관료주의는 관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웬만한 집단에는 다 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관료주의에 한해서는 그 어떤 나라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관료국가라서, 비록 관료에게 큰 욕을 당하거나, 혹여 탈이 잡힐까 멀리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평생을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나 보며 자판이나 두들기는 관료를 평생의 직업으로 동경하고 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불철주야 매진하고 있으니 한국의 대기가 수직적 위계질서의 위압적 분위기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관료주의가 스며든 모든 집단 예를 들면 대기업, 언론, 대형 병원, 대형 교회, 학교, 노조,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조금 큰 식당이나, 택시나 버스 기사들까지도 정부의 각 해당 부서에서 하달하는 공문이나 언론 보도에 따라 마치 자신들이 관료라도 되는 듯이, 국민의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데 앞장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사불란한 조치들과 마치 하나의 입처럼 말하고 결속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코로나 사태를 맞아 국민을 오도하고 백신을 맞추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 작당이라도 하지 않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또한 한국의 관료주의가 그들의 권한을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코로나 예외 사태를 맞아 즐거운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 축제가 끝나면 그들이 겪어야 할 섭섭함에 동정심이 생길 정도이다.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원들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참고해 입법활동을 하지만, 이들 전문가들이 입법전문가가 아닌 경우가 많아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현재 한국의 상황은 모순과 거짓이 넘쳐나고, 경험보다 허구를 더 믿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져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한편의 코미디며,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전체주의 시대 같아 비현실적이다.

4층 건물에서 누군가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2층 이상의 건물을 다 없애는 것, 다리를 건너다 한두 사람 죽었다고 수만 명이 매일 건너야 하는 다리를 봉쇄하는 것, 물면 좀비가 된다고 사람의 이빨을 전부 뽑아 버리는 것, 부모에 암이 있다고 자기의 장기를 미리 제거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극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고 있다.

먹을 때는 벗고 먹지 않을 때는 써야 하는 마스크,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2차도 모자라 4차까지 맞는 백신, 감기 증상만 있어도 코로나 검사를 하는 사람, 코로나 검사 양성이라서 응급실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응급환자, 재택 치료하다가 죽는 환자가 생기는 것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계속 반복되므로 갈수록 사람을 질리고 허탈하게 만들어 저항할 의지의 싹을 잘라버린다.

관료와 관료주의에 물든 자들의 이러한 조치들이 전부 국민이 낸 세금으로 행해짐을 생각하면 세금이 국민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데 쓰인다는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든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주객전도의 세상이 됐음도 인정하기 싫지만,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 백신 접종 (PG) (사진=연합뉴스 제공)


특히 교사들이 코로나 사태에서 전형적인 관료들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는 관료주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실로 충격적이다. 어쩌면 교사들의 관료화는 한국의 풍토상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사들은 대학 시절 배운 것만으로 교단에서 정년을 다할 때까지 서 있기에 충분하고, 일 년에 두 번씩이나 방학이라는 긴 휴가를 갈 수 있다. 능력, 성과, 학생 수, 국내외 경기 여건과 관계없이 호봉에 따라 월급이 올라가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해고당할 일이 없는 매우 이상적인 직장이다. 따라서 그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부 당국이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그들도 교사가 된 순간부터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제자들에게 이념을 주입하고, 선택할 자유를 주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올바르다고 가르치고,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게 만들고, 선생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게 만드는 것은 제자들의 일생을 망치는 것이다. 상식과 원칙,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다 한다고 따라 하고, 상부의 지시라서 해야 한다면 그것은 교사로서 양심 차원이 아니라 인간 실격의 차원이고, 나라의 미래를 망친다는 점에서 매국의 차원이다.

지난 2020년 5월22일 한국행정연구원이 발표한 코로나19 이후 정부조직관리방향 자료 중에서 PART 3. 정부조직관리와 의사결정상 문제점: 코로나19 대응 사례를 중심으로 중에서 그림 3.-1 캡처.


내적으로는 복종의 전문가들이지만 외적으로는 명령 전문가들인 관료주의자들이 친절한 미소와 강압적인 태도의 양면의 칼로 자신이 상대하는 민원인, 고객, 학생, 신도, 직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제압하여 복종의 교리를 퍼뜨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문서를 만들어 서명 날인을 하도록 만들어 세금과 후원금을 걷어 들이고, 책임과 의무를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지우지만 자신은 정작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은 책임 자체가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무책임은 관료주의자들의 생활 자체며, 그들 세계를 지탱해주는 도그마다. 그들에게 책임을 따지면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담당이 아니다. 해당 부서로 연락하겠다. 권한이 없다. 위선에서 내려오는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 인과성이 없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마음껏 짖어 대라, 그럴수록 빨리 조용해질 테니까.”

책임 소재가 명확하고, 재산상의 피해가 막대하고, 많은 인명 손실이 있어도 처벌받는 사람은 극소수며 그마저도 처벌이 턱없이 가볍고,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으며, 자신을 재수가 없거나 토사구팽당한 피해자로 생각한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알베르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한 말이다. 관료주의자들이 우리를 복종하게 만드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이념이, 어떤 당파가 하는 명령이라서 불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불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복종하는 인간이자 저항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언제, 왜,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지만, 언제, 왜,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복종과 저항의 조건들의 합이다. 저항이 없는 사회는 공동묘지나 다름없다.

오순영 칼럼리스트 / 가정의학과 전문의